적성리전투 전승비.순국위령비. 김진배 전)동로면장의 현충일 행사
적성리전투 전승비.순국위령비. 김진배 전)동로면장의 현충일 행사

오늘의 실사는 적성전투의 마지막 편이다. 특별공격 대대는 적정 탐색 목적에서 투입되었지만 적성리 전투에서 1차 승리를 거둔 뒤의 작전회의에서 적군과 충돌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에 달하고 보니 그리고 더 이상 대적하다가는 특별공격 대대 자체가 전멸을 변하지 못할 것이라는 가상과 그나마 희망적인 것은 아직 이 지역으로 진입하였던 남쪽으로의 퇴로는 개척 가능하다는 것이였다. 대대장도 당시의 위기를 벗어나고 싶은 것은 솔직한 심정이었는데 미군 고문관들도 대대장이 결심을 촉구하였다. 대대장의 판단으로는 이곳에서 탈출은 할 수 있겠지만 그 대신 적지 않은 희생을 각오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었다. 또한 적군이 동서 북쪽의 삼면에서 공격하고 있는데 남쪽의 아군 전지에 이르는 보급로를 염두에 두지 않는 지휘관은 없을 것으로 생각이 미쳤다. 그래서 후퇴하다가 죽을 바에야 죽든 살든 현 진지에서 지탱해 보기로 결심하고 독단적으로 진지 사수를 명령하였다. 그리고 대대장은 “날이 밝으면 증원 부대가 올 것이다”라고 하면서 부하들을 격려하였다. 적군의 제2차 공격도 역시 북방인 제2중대 전면인 금곡동 즉 적성3리 인 쇳골 쪽에서 시작되었다. 이미 날이 밝기 시작하였기 때문에 아군의 조준 사격으로 적군을 공격하였으나 많은 수적 우세를 앞세운 적군은 상당한 희생을 각오한 듯 파상적으로 육박하여 왔다. 중대장 손장래 중위는 대원들을 격려하면서 3.5인지 로켓포를 직접 사격하기도 하고 경기관총을 사수가 고장 처치를 하지 못하여 쩔쩔매는 것을 발견하고 이를 고쳐주는 등 분전하였으나, 결국 6시 40분경 중앙 소대 정면이 적군의 공격으로 돌파되었다. 그러나 대원들은 진지에서 육박전을 전개하였는데 대검으로 격투를 벌이는가 하면 돌파한 적군의 병사들에게는 제3중대 일부 병력과 인접한 좌우의 소대들이 M2칼빈 소총으로 집중 사격을 가함으로써 적군들의 돌파구를 봉쇄하고 진지를 회복하였는데 진지에 접근하였던 적병들은 모조리 격멸되었다. 초기의 이 전투에서 아군의 피해는 극히 경미했을 뿐 전체의 대대는 건재하였다. 적군은 두 번째 시도한 파상 공격이 막대한 희생자만 내고 실패하자 이번에는 제3중대 정면인 서쪽과 남쪽에서 공격을 가하여 왔다. 이곳은 장자동에서 평지 방면을 말한다. 이때 적군은 노은리 노래이 뒤에서 무라이에 이르는 바우재까지 완전히 장악하여 아군의 퇴로를 차단할 계획이며, 멀리는 현 솔밭 모리 허공 다리 천주봉 뒤의 우두 고개까지 완전 포위망 안에 넣고 있었던 것이 뒤에 알려진 전황이다. 그러나 그 정면은 적군이 공격하기에는 매우 불리한 조건이었다. 서남쪽은 지서의 석축 방벽에다 콘크리트 토치카까지 완비되어 상대적으로 아군에게는 방어하기에 유리한 조건을 제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 방면에서 공세를 취하다 보면 완전히 노출된 밭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었던바 대대의 고정된 화력을 가려서 막고 덮을 엄폐물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1~2차 공격에서 실패한 것을 만회라도 해 보려는 심산인지 일거에 눈앞에 있는 아군을 전멸시키려고 무리하게 따발총을 휘두르며 공격하여 왔는데, 아군 진지 전방 50m를 넘지 못하고 많은 전사자만 남기고 또다시 퇴각하여 아군의 사기만 북돋아 주었다. 이 싸움에는 대대장을 위시해서 부관 허태운 중위, 정보장교 한신해 중위, 보급관 이국영 중위 등 참모에 이르기까지 크게 공헌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2차에 걸쳐 공세에 실패한 적군은 주간에는 더 이상의 공격을 단념하고 전면에서 간헐적으로 거의 신경질적인 사격만 가하였고 10여 발의 박격포 사격이 있었으나 불발탄이 대부분이고 아군의 피해는 거의 없었다. 적군이 발사한 포의 종류는 92mm 박격포였는데 다행히 그들이 포환이 불량했고 그나마 실탄이 부족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사격을 가하지 못했다. 아군으로서는 하늘이 도운 것이었다. 만약 적군의 박격포 사격이 아군 진지 내에 계속 떨어졌다면 이를 막아낼 방도가 없었다. 이날 대대에 파견된 미군 고문관들은 본대에 무전으로 호출을 시도해 보았으나 오후가 되어서야 교신이 성사됨으로써 지원을 요청하게 되었다. 1월 14일 새벽 1시에 북괴군은 사방에서 공격을 가해왔다. 전면적인 공격이었다. 북괴군은 13일에도 꽹과리와 북, 호각까지 총동원하여 불면서 부분적인 공격으로 아군을 괴롭혔다. 탄약의 재고량과 개인 휴대량을 감안한 대대장은 각 병사에게 북괴군이 10m 내지 20m의 최단 거리에 이르렀을 때 정확한 조준 사격을 강조하는 한편 결정적인 시기에는 수류탄을 투척하도록 지시하였다. 북괴군도 어제의 막대한 손실 때문인지 공격의 위세는 많이 약화 되었지만, 그러나 집요하게 공격을 계속하였다. 아군도 이제는 침착하게 사격을 가함으로써 진지 앞에는 엄청난 시체들이 깔리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교전은 날이 밝을 때까지 계속되었는데 대대가 계속 침착하게 진지를 고수함으로써 북괴군의 기도는 완전히 좌절되고 말았다. 날이 밝자 오전 9시경에는 아군이 정찰기가 적성리 상공에 날아와서 지상의 전환을 세밀한 부분까지 장시간에 걸쳐 정찰한 후 돌아갔다.

채희영 전)경상북도의원
채희영 전)경상북도의원

그 후 약 30분도 지나지 않아 F5 전투 폭격기 4대가 작전지역에 이르렀는데 이를 지켜본 아군의 사기는 하늘은 찌를 듯 치솟았다. 전폭기들은 미 고문관들의 작전 유도를 받아 북괴군의 진지에 네이팜탄과 기관총 사격을 퍼부었다. 이들 전투기가 모든 작전 임무를 끝내고 기지로 돌아가자, 이번에는 헬리콥타가 나타나서 탄약과 야전 식량을 동로초등학교 교정에 내려주었다. 아군들이 보급품 운반을 위해 지휘 부인 동로지서에서 학교 운동장으로 나가는 도중 당시에는 나무다리였던 지금의 적성교를 막 건너는데 북괴군이 집중 사격을 가해 미군 연락장교인 하빈슨 소령과 통신병이 부상을 당하였다. 북괴군들은 보급품들이 쌓여 있는 학교를 목표로 박격포를 쏘았는데 그중 1발이 건물에 적중하여 교실 1칸이 파괴되었다. 그러나 아군과 청년방위대원들은 희생을 무릅쓰고 결사적으로 이들 보급품을 모두 옮기는데 성공하였고 이때 제2차로 F5 전폭기 4대가 지원차 북괴군의 진지를 강타함으로써 북괴군 세력은 침묵을 지키게 되었다. 아군들은 식량과 보급품 탄약을 지급받고 사기가 충천하여 앞으로 얼마든지 싸울 수 있는 마음의 다짐이 굳어졌다. 한편 미 제10군단의 본부에서는 특별공격 대대가 북괴군에게 전면 포위된 채 고전을 면하고 있지 못하고 있자 이를 구원하고자 장갑 기동부대를 급파시켰으나 이들이 적성의 전장으로 전진하던 중 송평리에서 적성리로 약 1km 지점인 허공다리 부근의 도로상에 북괴군이 아군의 지원부대를 예상하고 예정 접근로 중 가장 대로 지점인 이곳에 매설한 대전차 지뢰에 의하여 선도 차 1대가 완전 파괴됨으로써 후속 차량의 진로를 완전히 차단하고 말았다. 따라서 장갑차 및 보급 차량 등 70여 대가 길이 막혀 증원 부대는 교통망 개설이 어려워 더 이상 진출을 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지뢰 탐지와 제거 작업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 증원 부대는 안동에서 예천을 거쳐 금곡동 즉 예천군의 금당실 마을에서 두인 이라는 곳을 거쳐 수평으로 진입하였다. 이들 증원 부대 및 보급 차들이 평동 허공다리에서 이와 같은 사고가 있었다는 것을 특별공격 대대가 알게 된 것은 다음날 전투가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연락이 되어 알게 되었던 것이다. 밤이 되면서 북괴군은 전일의 공격 방법대로 공격을 전개하여 왔는데 아군은 실탄이 그런대로 확보되고 휴대 식량도 지탱 할만하여 항전의 어려움은 전일에 비하여 줄어 들었다. 아군은 북괴군의 공격 방법과 전술도 어느 정도 알고 있기 때문에 10m 앞까지 북괴군을 유인하여 적정거리가 되면 수류탄으로 결판을 내고 남아있는 북괴군은 칼빈 M2로 확인 사살하여 수많은 북괴군을 사살 할 수 있었고 그야말로 철통같은 전면방어 형태의 전술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1월 15일 날이 밝으면서 북괴군의 공격은 중지되고 말았다. 북괴군으로서는 그간의 헤아릴 수 없는 병력 손실로 인하여 더 이상 공격을 지속할 능력이 없었다. 따라서 북괴군은 일부 병력의 엄호부대를 남겨두고 북쪽 단양 방면으로 후퇴하였고, 11:00경에는 이들 엄호부대들마저 퇴각 함으로써 만 4일에 걸친 크나큰 격전장이었던 적성지구 전투는 한국군 특별공격대대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나고 말았다. 북괴군들이 사방의 능선을 타고 북쪽으로 퇴각하는 것을 목격한 장병들은 3일 만에 호 밖으로 나와서 각 중대 정면에 대하여 탐색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대대가 거둔 전과는 다음과 같다. 북괴군 사살 1,247명, 포로 군관 7명, 사명 72명, 각종 소총 370정, 박격포 82mm 2문이며, 아군 손실은 전사 9명, 부상 2명, 미군 부상 2명, 민간인 사망 4명, 경찰 부상 2명, 청년방위대원 전사 7명 (이윤재. 이양배, 강명수, 박종호, 황병오, 손문이) 등이다.

유기 시체에 비해 노획 무기가 적은 것은 북괴군의 공격부대가 후퇴하면서 전사자의 무기를 회수하여 갔기 때문이다. 전투가 끝나고 전투 성과가 거의 확인되었을 때 증원 부대가 도착하였는데 특별 공격대대의 단장인 하이네서 중령은 우선 적성리 전투의 대대적 전과 앞에 감탄하였고 그의 장병들도 그들 자신이 전과를 확인하면서도 믿으려 하지 않을 정도였다. 이와 같은 대대적인 승리의 보고에 접한 미군 제10군단장 알몬드 소장은 헬리콥터로 참모들을 대동하고 날아와서 배동걸 소령의 보고를 받고서 부관감 이지형 준장이 현지에 도착하여 하나하나 전과를 확인하고 돌아갔다. 1월 16일 특별공격 대대는 북괴군 제10사단의 1개 연대를 완전히 섬멸시키고 이날 미군 제10군단의 명령에 의하여 충주 방면으로 전진 하였다. 이에 적성리 전투에 대한 미 제10군단장이 특별공격 대대장 배동걸 소령에게 보낸 표창 내역이다. 미 제10군단 사령부 1951년 1월 31일 특별공격 대대장 귀하 ⓵ 미 제10군단에 의한 북한 공산군 제2군단 격멸에 있어서 특별공격 부대가 성공적인 역할을 하였으므로 자에 그 공적을 찬양하는 바입니다 ② 특별공격 대대는 그보다 수배나 되는 큰 부대가 담당하여야 할 지역을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과감한 기동성과 탁월한 지휘 정신으로 수적으로 훨씬 우세한 북괴군에게 타격을 주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수적으로 2~3배나 되는 북괴군을 타격하였으며 비교적 적은 손해로 북괴군의 대다수를 격멸하였습니다. 또한 직전 지역은 험준한 산악지대로서 동기 혹한기였으며 장병들에게 극심한 곤란을 주었던 것입니다. ③ 본관은 특별공격 대대가 맡은 바 사명을 수행하면서 성공적이었음을 치하하는 바입니다. 미 제10군단장 육군 소장 에드워드 M 알몬드.

지금은 1971년 4월 1일 동로면 노은리 156-3번지에 건립된 적성전투 전공비를 새워 기념하고 있으며 2001년 6월 25일 적성리 전승비 및 순국 위령비를 높이 570cm의 양립하면서 대규모 비를 다시 건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늘로써 채희영의 잊혀지는 통한의 문경 실사는 끝맺고자 한다. 그동안 졸고를 애독해 주신 독자분들에게 감사함을 드리고 머리 숙여 경의를 표합니다.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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