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국방TV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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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1951년 1월 12일부터 15일까지 4일간 계속된 동로면 적성리 전투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미군 제10군단의 함경남도 흥남지구의 그 유명한 철수작전을 엄호하던 동군단의 한국군 특별 공격대대는 1950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날 오후에 마지막 철수 부대로서 함경남도 연포 비행장에서 미군 수송기로 철수하여 이날 부산 수영 비행장에 도착하였다. 25일 동 대대는 부산 북방 50km 지점에 있는 1,209고지인 신불산으로 전진하여 잔여 공비 소탕 작전에 참여하다가 다시 북상하여 경주~영천을 거쳐 1951년 1월 10일에는 안동에 도착했다. 당시의 전황은 중공군이 38선 부근에서 전반적인 공격을 전개함으로써 아군은 재차 수도를 포기하고 수원 선으로 전선을 이동시키고 있었고 중부 전선의 한국군 제3군단과 미군 제10군단 사이에는 구멍이 생기게 되어 이곳으로 약 2개 사단으로 추정되는 북괴군과 중공군이 침투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적군은 1월4일 홍천을. 1월 6일 횡성을, 1월 8일 원주를 거쳐 그 일부 병력은 안동선까지 남하하고 있는 실제 상황 아래 있었다. 이와 같은 위기를 타개하고자 미 제10 군단장 알몬드 소장은 마산 지역에 있는 미 제1해병사단을 안동으로 이동시켜 적군의 남하를 저지하고 아군의 보급로인 영덕~안동~함창선을 고수하게 하였다. 동시에 군단장은 한국군 특별공격 대대로 침투하는 적군을 탐색 또는 격멸시키기 위해 1월 11일에 탐색 활동을 명하였다. 이리하여 배동걸 소령이 지휘하는 특별공격 대대는 불과 300명 미만의 병력을 보유하고 좌우에 우군이 없는 고립 상태에서 문경군 동로면 적성리에 있는 계곡으로 탐색 활동을 시작하였다. 적성리는 1km 평방의 산간 분지인데 서남쪽으로 흐르는 하천을 경계로 하여 남쪽은 노은리이고 북쪽은 적성리인데 그 중간 장터 마을에 동로면사무소 및 경찰지서 우체국 등이 있고 노은리에 동로초등학교가 있다. 이곳 주민들은 당시 500여 명이고 피난을 가지 않고 그대로 생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이곳의 지형은 소백산맥의 주류에 속하는 지대로서 바로 북쪽은 해발 1,000m가 넘는 수리봉과 황정산이 솟아있고 적성리 좌측 어귀에는 823m 천주봉의 날카로운 세로로 막힌 능선들이 남쪽으로 뻗어 있다. 이 천주봉은 지역민들에게 붕어 산이라고도 불리기도 한다. 마치 그 생김새가 붕어가 입을 벌리고 있는 모양 같기 때문이기도 하다. 역시 우측에도 600~700m의 불규칙한 횡으로 막힌 능선들이 손가락 모양으로 뻗어 있어서 전입으로는 양의 창자같이 구불구불하였으며 겨우 차량이 일방통행이 가능한 곳이었다. 당시 날씨는 영하 15℃를 오르내리는 기온이었으며, 약 15cm의 눈이 쌓여 있었다. 특히 동 대대는 일본에서 편성되어 흥남지구에 상륙하였으나 적군과의 접촉 기회는 없었고 부산 신불산이 흩어져 있는 공비 소탕전에서 첫 전투를 하였는데 험악한 산중에서 적군을 탐색 공격하다가 약간의 희생자를 내고 막심한 고생을 하였기 때문에 사기는 그리 높지 않은 편이었다. 그러나 이 대대는 보통의 대대보다 화력과 장비가 월등히 우세 하였다.

채희영 전)경상북도의원

즉 개인 장비만 보아도 특수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하기에 적합한 대부분의 개머리판이 쇠로 된 M2 칼빈, 자동소총, 경기관총, 로켓포로 무장하였고 중화기 반원들은 권총으로 이중 무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대대에는 3명의 미군 고문 장교와 통신 하사관들이 있었고 동대대는 미 제10군의 특별행동 그룹의 하이디스 중령의 통제하에 있었다. 적성리 전투의 개요는 1951년 1월 12일부터 1951년 1월15일까지 4일간 계속되었다. 참전부대 몇 주요 지휘관은 아군 측에서는 미 제10군단 특별공격 대대장 소령 배동걸, 제1중대장 대위 윤성모, 제2중대장 중위 손장래, 제3중대장 대위 정창화이며 병력은 300명이었다. 반면 북괴군은 제10사단 예하 연대의 3,000여 명이었다. 전투 경과는 1951년 1월 12일, 1월 11일 안동에서 차량으로 점촌으로 이동한 특별공격 대대는 이날 미명에 점촌에서 출발하여 전술 행군종대로서 목표를 동로면 적성리에 두고 행군을 시작하였다. 상급 부대에서 탐색부대를 적성리 부근으로 투입한 이유로는 적군이 단양에서 남하하려면 어차피 이 계곡을 통하지 않고는 자유스러운 침투 행동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적성리는 단양~영주~문경~점촌~예천등을 연결하는 원주상의 구심점에 있어, 특히 점촌, 안동 방면으로 진출하는 산간 기지이다. 특별 공격대대는 제2중대가 첨병 중대 그리고 제1, 제3중대의 순으로 전진하였는데, 이렇다 할 적정이 없는 가운데 첨병 중대인 제2중대는 대대 작전참모를 겸무하고 있는 손장래 중위 지휘 아래 13:00경에 동로면의 장터 부락에 도착하였다. 한편 제2중대가 이곳에 도착하기 전 수평리에 이르렀을 때 이곳에는 동로면 지시 경찰관과 청년 방위 대원 60여 명이 집결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단양 쪽에서 피난해 온 주민들로부터 적군이 대구 남쪽 경산으로 집결하라는 상부의 명을 받고 이동 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아군이 적성리로 전진한다는 말을 듣고 이들이 앞장서서 정찰 활동을 하면서 아군이 동로장터에 도착하는데 이상이 없도록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적성리에 아군이 도착하자 청년 청년방위대원인 이양호, 정기창, 이정록 등 3명이 제2중대원 2명의 지원을 받아 적성리 마을 북쪽에 있는 벌재로 진출하여 단양 쪽에서 남하하는 적군의 정보를 수집하는 임무를 스스로 맡았다. 한편 제2중대장 손장래 중위는 지형을 분석 판단한 결과 이날 밤지역 내에서 숙영하려던 동로초등학교를 이용했으면 좋겠으나 적정이 불명확한 상황이고 언제 어느 장면에서 침공해 올지 모르는데 대비하여 동로지서 뒷편 능선 일대에 1차 적으로 방어진지를 점령하기로 계획을 수립하여 두었다. 그날 오후 2시가 되어 주력 부대와 본대가 도착하였는데 대대장 배동걸 소령의 의견은 아직 이렇다 할 적군의 동정이 전방에 나타나지도 않았는데 구태여 숙영을 벌판에서 할 필요가 있겠느냐며 동로초등학교 교실을 이용하는 쪽으로 하자는 것이었다. 내일 다시 산악지대를 행군하려면 교실에서 병사들을 재우는게 피로회복에 큰 도움이 되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대장은 작전 장교를 겸하고 있는 제2중대장의 건의를 받아들여 대대가 전면방어 개념에 의한 방어진지를 적성리 장터를 중심으로 구축 작업에 착수하는 동시에 황장산 능선 및 계곡 등 적의 예상 접근로에 대한 수색에 나섰다. 진지 공사는 3~4명의 공용호를 파게 하였는데, 북쪽은 제2중대, 동쪽은 제1중대, 서쪽은 제3중대를 배치하여 각자 구역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대대본부 지휘부는 동로지서에 두었다. 지서의 4주에는 약 2m의 높이로 석축이 구축되어 있었고 요소요소 콘크리트 토치카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진지는 분지의 낮은 지점에 있고 만약 적군이 서북쪽 높은 지점에서 공격을 감행하여 올 경우 지극히 불리한 지점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더구나 적군의 화력이 곡사포로 무장 되었다고 가상 한다면 그야말로 독 안에 든 쥐나 다름이 없었다. 그리고 지서 요원 16명과 청년방위대원 42명이 본부의 방어 정면을 담당하였는데 청년방위대원들의 장비는 99식 일본제 소총에다가 실탄은 정당 5발만을 휴대하는 미비한 실정이었다. 저녁 8:00가 되자 벌재 쪽에서 최초로 총성이 들려왔다. 청년방위대 특공대장 임한기는 대원중 황진호, 김상숙 등 2명을 벌재로 보내서 적군의 동정을 탐문하게 하였던바 아군의 매복 초소에 가보니 초소는 비워둔 채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이다. 마침 이때 청년방위대원 1명이 들어와서 보고 하기를 적군이 적성리를 향해 침투 중이며 아군은 적군들과 교전 중이었음을 목격하였으나 그 후 상황은 아는 바 없다고 하였다. 한편 북괴군 제10사단의 연대 규모 병력은 벌재에서 아군의 전방 경계부대와 조우하자 장터 일대에 병력의 집결을 탐지하고 그곳에서 병력을 동서 남으로 기동시켜 4주 요부 능선을 점령하였는데 이곳에는 지난해 그들이 침공하여 낙동강까지 내려갔을 때 그들의 내무서가 동로면에 들어오면서 자체 경비를 하기 위해 능선 주위에 구축해 두었던 교통호가 그대로 남아 있어서 적들은 쉽사리 양호한 진지를 확보하게 되었으며 아군 전지를 사방에서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당시 아군들은 적군들의 이러한 기도를 알 수가 없었다. 1월13일 아군은 어제의 행군 끝에 호 속에서 지루한 하룻밤을 새운다는 것은 그리 용이 한 일이 아니었다. 영하 18℃의 한기 속에서 거의 뜬눈으로 새우게 된 셈이었다. 새벽 5시경 북쪽인 쇳골리와 장터에서 석항 눌기로 넘어가는 덕고개 쪽에서 꽹과리와 북소리가 울리기 시작한 것을 신호로 하여 동쪽과 북쪽에서 기관총과 소총 사격이 아군의 진지를 향해 집중되었다. 이와 같은 사격은 꽹과리 북소리와 함께 약 30분간 계속되더니 곧이어 적군의 근접 공격이 시작되었는데 그 제1파는 동쪽에서 아군 제1중대의 정면으로 접근하였다. 새벽 5시경이면 그 당시의 쌓인 눈으로 인해 50m까지는 적군들의 접근을 확인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아군은 적군을 가까운 거리까지 유인하여 M1 소총과 M2 칼빈 소총으로 요격할 수 있었다. 적군도 그 당시 1분간에 72발이 발사 가능한 다발총으로 요란스럽게 공격하여 왔지만, 아군의 월등하고 우세한 무기의 화력 앞에는 어쩔 수 없이 제1차 적군의 공격은 아침 6시경에 많은 시체를 남겨둔 채 그들의 진지로 돌아가고 말았다. 대대장 이하 전 장병은 수적으로 우세한 적군의 공격에 대하여 긴급 작전회의가 개최되었다. 그 당시 지배적인 의견은 우선 전술 임무 수행에 있어서 가장 불리한 저지대 작전 지역인 이곳에서 철수하자는 안이었다. 왜냐하면 아군은 후속부대가 없는 적군의 동정을 탐색하는 임무를 띤 부대이기 때문에 많은 희생을 강요당하면서 적군과 대치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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