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국방tv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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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낙동강 상류의 피아간의 각축전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국군과 북괴군은 소백산맥 선에서 격전에 이어 국군 제8사단이 영주~안동선에서 제6사단과 제1사단 양개 사단이 점촌~함창 일원에서 혈전을 거듭하는 국면과 낙동강 교두보의 경계를 위한 제1군단과 제2군단의 양개 군단의 철수 상황을 수록해 본다. 전황의 추이를 개관하여 보면 아군의 선전, 선투로 소백산맥 선의 돌파가 지연되자 북한의 괴수 김일성은 7월 21일 사변을 일으킨지 28일 만에 수안보에 설치한 북괴군의 전선사령부에 직접 내려와서 “안동 ~함창~영동의 방어집단을 격멸하여 낙동강 이북과 이서 지역을 탈취하고 낙동강을 신속히 도하 하여 차기 침공에 유리한 조건을 형성한다”는 기본책략 아래 독전 하기에 이르니 북괴군 제2군단장 김무정 중장은 7월 26일까지 안동을 탈취하도록 엄명을 내리면서 북괴군 제12사단이 5번 작전 도로로 계속 침공하고 예비로 전환된 북괴군 제8사단을 예천으로 우회시켜 안동을 협동 공격하게 하였으며 점촌~함창 정면으로 북괴군 제1, 제3 제15사단을 집중적으로 투입하여 상주~김천 선을 돌파하여 관통하기로 하였다. 한편 국군은 북괴군의 접근로 노출로 야기된 화령장터 부근의 위기를 극복하기에 이르자 제1군단은 안동으로 급하게 전진시켜 중앙 가도 연변에서 북괴군 제8, 제12사단과 대적한 아군 제8사단과 충북 보은에서 안동으로 이동한 수도사단을 통합지휘하여 안동 방면에 전력을 다하게 하고 제2군단은 제6. 제1 양 개 사단을 지휘하여 점촌~함창선에서 북괴군 제1, 제13, 제15사단의 저돌적인 침투와 습격을 격멸하면서 김천을 돌파하여 관통하려는 북괴군의 기도를 저지하였는데 이때 미군 제25사단이 전선의 정면을 증원하고 제1기갑사단이 영동~김천선의 경부 가도를 방어하고 있었다. 7월 29일에 대성천 도하를 감행하면서 일제히 공격에 나선 북괴군 제12사단은 아군 제8사단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예천으로 우회한 북한 괴뢰군 제8사단은 이곳을 방어 중인 수도사단의 제18연대를 압박하였으며 동해안으로 침공 중인 북괴군 제5사단의 일부와 정동진 및 임원진으로 상륙하여 내륙으로 침투 습격해 오는 북괴군 제766 부대가 영양~청송 쪽으로 당도하기에 이르자 기갑 연대와 강원도 경찰대대를 이곳으로 급진시켜 안동 동측 후방에 대한 방호를 강화하였다. 이처럼 삼면에서 전략적 요충인 안동을 포위하기에 이르자 북괴군 제12사단은 동반한 T34 전차를 선두로 내세워 아군 제8사단 진지 선을 중앙으로 돌파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점차로 증강된 근접 지원으로 이를 격파하면서 최후 저지선을 계속 확보하였으며 북괴군 제2군단의 주력 부대의 침공을 맞은 아군 제6, 제1 양개 사단도 옥녀봉~어룡산~새봉~유곡선과 함창 서북쪽의 국사봉 일대에서 일진일퇴의 혈전을 거듭하여 북괴군의 세력을 제압하고 있었다. 그런데 경남 진주 정면의 위기를 계기로 낙동강에선 교두보를 확보하기로 한 미 제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의 명령으로 제1. 제2 양개 군단은 7월 31일부터 8월 1일까지 양일간에 걸쳐 낙동강을 도하하여 군의 계획에 따른 X 선상의 진지를 확보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때 안동에서 철수한 수도사단은 청송으로 이동하여 이곳에서 계속 침공의 북괴 세력을 지향한 괴뢰 12사단과 격돌하게 되었다. 그러나 문경 전투는 이화령과 조령에서 시작되어 제6사단이 양개 준령에서 후퇴 함으로써 획기적인 변화를 제공하였으나, 전투 후의 개황을 살펴보면 제6사단에서 일단 문경 부근 전투를 끝내고 영강의 하반을 따라 물러선 6.25 발발 24일 만인 17일 현재 인접 부대의 전황을 살펴보면 우측 인접인 제8사단은 죽령에서 북괴군 제8사단과 대결 끝에 죽령을 내어주고 한걸음 뒤로 물러서서 풍기~영주 간의 중요한 지역을 확보하고자 주야로 격전을 전개하고 있었으며 좌측에 인접하고 있는 제1사단은 충북의 미원에서 북괴군 제15사단의 침공을 막아 13일 이후 이날까지 고수하며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따라서 이날 현재의 병력 배치 상황을 표면상으로 일변할 때는 풍기~동로면 적성리~문경 남쪽 3km 지점인 마성~가은~충북 미원으로 이어지는 소백산맥 남쪽 기슭의 진지를 아직도 견고하게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사실은 오히려 북괴군의 동정이 경미한 듯한 서반부에서 큰 변화가 나타나고 있었다. 그 까닭은 전투가 점차 치열함에 따라 사단마다 담당 지역 내의 중요한 선을 방비하는 데 치중하게 됨으로써 문경~충북 미원 간의 45km에 달하는 고산지대라 거의 공백 상태로 변하게 되자, 바로 이점을 노린 북괴군 제2군단장 김무정 중장이 이 지역으로 2개 사단을 투입하여 그중 최용진 소장이 지휘하는 북괴군 제13사단은 문경 서남쪽의 가은을 도모하게 하고 제5사단은 충북 미원 동북쪽 10km 되는 부흥리~화북~화서~상주를 축으로 하는 선을 이어 똑바로 돌입하게 되니 양개 사단이 어느덧 소백산맥을 돌파하여 현 병력 배치선 남쪽으로 밀려들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육군본부에서는 이날 현재까지 이 같은 북괴군의 기도를 파악하지 못한 채 다만 문경을 상실한 직후에 중부지역으로 미치는 북괴군의 압력이 가중된 것을 중요시하여 육군 직활인 김희용 중령이 지휘하는 제17연대가 급속히 함창으로 이동하여 제2군단장의 지휘를 받도록 조치하였다. 그런데 제17연대가 충북 보은을 출발하여 17일에 화서면으로 내려가다가 북괴군 제5사단의 선봉과 상주시 화령장 터에서 갑자기 조우하여 뜻하지 않게 후방에서 격돌하게 되자 이때야 비로소 북괴군의 기도함이 무엇인지 가늠하게 되어 전선을 급하게 조정하기에 이르렀다. 즉 충북 미원의 제1사단을 상주시 화서면으로 뽑아 상주 정면의 방어력을 강화하고 또한 당 사단이 가은 부근까지 방어 정면을 연장하도록 하는 동시에 수도사단 예하의 윤춘근 중령이 지휘하는 제1연대를 제2군단에 증파하는 등 제1, 제2군단 간의 공백 지대를 보충하여 메꾸기로 했다. 이리하여 사단은 영강선으로 물러선 직후로 가은 서쪽의 일대까지 포함한 18km의 전투 정면을 담당하게 되었거니와 바로 전면에는 북괴군 제1. 제13 양개 사단이 계속 남침할 기세를 보이고 있었다. 즉 문경을 점령한 최광 소장이 지휘하는 북괴군 제1사단은 3번 국도를 따라 유곡~점촌을 축으로 하는 선으로 침공을 꾀하는 듯 그 선발대가 벌써 마성면 남호리까지 침투하였으며, 또한 가은읍 서북방 7km 지점인 완장리 부근까지 남하한 것으로 알려진 북괴군 최용진 소장이 지휘하는 제13사단은 여기서 양분하여 일단의 무리는 가은으로 그리고 다른 일대는 농암리 쪽으로 각각 나누어 진입하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리고 이들을 통제한 군단 사령부도 이즈음에 충주에서 수안보로 옮겼다고 하여, 특히 북괴군 제2군단장 김무정 중장이 강조하기를 국군 제6사단을 공격하라고 외쳤다고 하니 제6사단의 전력을 약화하기 위하여 집중 공격이 있으리라는 점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채희영 전 경상북도의원
채희영 전 경상북도의원

어떻든 이들 북괴군 들은 조금도 속도를 늦추지 않고 강공책을 위하여 곧 진지 전방으로 밀려들 징후가 역연하였다. 한편 제6사단은 이 전투가 끝날 무렵인 17일 밤에 지휘소를 점촌으로 이동하여 설치하고 주력을 영강 부근으로 뽑아, 대체로 마성면과 호계면에 걸쳐 위치한 오정산~견탄리~불정리~어룡산~왕능리~작천리로 이어지는 강안의 주요 고지와 능선에 진지를 편성하게 되었는데 3개 연대를 모두 일선에 전개하여 3번 국도 동쪽의 우측 일선은 민병권 대령이 지휘하는 제19연대가 맡고 어룡산 일대의 중앙 일선은 함병선 대령이 지휘하는 제2연대가 그리고 가은 부근의 좌측 1개 선은 임부택 대령이 지휘하는 제7연대가 각각 맡아 방어 태세를 취하였다. 따라서 제6사단은 예비대가 없어 모든 병력을 제1선에 배치하게 되었거니와 그래도 연대마다 5~6km의 담당 정면을 완전히 방어하기 어려워 사단 직활인 교육대의 기간병을 제2, 제19 양개 연대에 나누어 배치하기도 했다. 이것은 방어 정면인 이유도 있지만 아직 손실 병력을 충당하지 못하여 1개 연대의 총병력이 1,500명 수준을 넘지 못한데 큰 원인이 있었으며 장비 면에서도 서전 그대로의 상태에서 M-2 105mm 야포 8문을 보강한 것뿐이었다. 군 당국에서도 이 같은 실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보유 병력과 장비의 부족으로 그러할 수밖에 없었다. 20일부로 겨우 제1연대를 증원한 것을 비롯하여 제1사단이 후속하고 2주일 후에는 신병이 당도하게 된다. 그러나 이 같은 여건 아래서도 시련이 크면 클수록 장병들의 호국정신은 더욱 공고히 굳어져 이 이상 물러서느니보다 차라리 이곳을 납골의 성지로 하여 나라를 지키자고 다짐하였다고 하니 점촌~육곡 부근의 전투가 혈전 보러 점철된 점만 보더라도 능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이후의 지연전은 호국의 얼로 방벽을 쌓아 올리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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