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문경시 문경읍 갈평이 양민학살사건 희생자 위령비
경북 문경시 문경읍 갈평이 양민학살사건 희생자 위령비

필자는 경상북도의회 양민학살 진상규명 특별위원회 구성을 위한 조례를 발의하여 본회의에서 가결된 이후, 그 간사를 위촉 받아 경상북도 전역의 양민학살 진상규명을 위해 일정 기간 활동하면서 통한의 세월을 원망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6.25 전후를 통하여 문경에서 발생한 사건과 지역별 전투 상황을 살펴보면서 잊혀 가는 실사를 젊은층과 후대들도 호국보훈의 달을 보내면서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뿐이다. 우선 사건들이 당시 배경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사건 당시 대한민국의 실상은 국군이 태백산 지구 작전을 준비하던 중이였다. 기간은 1949년 9월 28일부터 1950년 3월까지이며 경상북도 예천, 안동 지역을 중심으로 제2사단 10연대 3개 대대, 제8사단 21연대 1개 대대 삼척 주둔 독립 1개 대대가 참여하고 있었다. 당시 상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대구와 포항에 주둔하던 제6연대에서 좌익성향의 반란 주모자 80여명이 태백산맥을 타고 북상하면서 태백산, 문수산, 일월산 일대에 거점을 두고 활동하던 공비들과 합류함으로써 이들의 병력이 280명으로 대폭 증강했고, 8월 4일에 이르러서는 경북지구 지휘체제를 제정비하여 제3병단으로 편성했다. 제주도 4.3 사건의 주모자였던 김달삼이 지휘하는 인민유격대는 태백산을 거쳐 일월산까지 침투하여 지방공비를 규합하는 한편 영일군 송라면 지경리에서 북한이 해상으로 수송한 무기를 인수하여 부대를 재편성 했다. 이들은 남로당의 9월 공세를 지원하기 위해 경북 일대에서 경찰지서 습격과 교량파괴, 식량약탈, 민간인 학살과 납치 등의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육군본부는 인민유격대와 지방 공비들로 인해 피해가 극심해지자 1949년 9월 28일 충북 단양에 태백산지구 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사령관에 제2사단 16연대장 이정일 대령을 임명했다. 사령부는 제2사단 16연대의 3개 대대와 제8사단 21연대의 1개 대대 그리고 삼척주둔 독립 1개 대대를. 포함해 5개 대대를 배속 받아 단양, 영원, 정선, 삼척, 예천, 안동, 울진군 등 총 8개군 지역에서 작전을 전개하게 되었던 것이다. 태백산 지구 전투사령관 이정일 대령은 “남침공비의 활동 지역 내에 있는 지방세포를 먼저 파괴시킴으로써 공비들을 분리 고립시켜 남침공비와 남로당과의 접선을 거부한다", ”대대 단위로 작전구역을 활당하고 공비의 루트에 매복초소와 분초를 설치한 후에 대대병력으로 대규요 수색작전을 실시한다”, “신간 부락을 파괴 소각하고 일정 지역에 집단부락을 50호 단위로 편성하여 남침공비와 지방공비와의 접촉을 단절시킨다”는 작전 개념을 세우고 이에 따라 토벌작전을 전개 하기로 결정한 상태였다. 이 작전 개념을 상기하면서 우선 문경읍 갈평리 양민학살사건부터 되짚어 보기로 한다.

채희영 경상북도 전의원
채희영 경상북도 전의원

◆ 문경읍 갈평리 양민학살사건 ◆

1949년 9월 23일 (음력 8월 2일) 육군 제8사단 16연대 소속 이근실 소대장 일행이 갈평리 안마을에 들어와서 마을 주민들을 빨치산과 내통하고 다이너마이트와 실탄을 숨겨놓았다고 우겨대면서 쇠 파이프와 나무 막대기 등으로 주민들을 구타하고 마을 민보단장과 부민보단장을 포함하여 모두 38명을 붙잡아 끌고가서 그중 17명을 여기저기에서 사살한 사건이다. 갈평의 양민학살 목격자인 이한섭씨는 “남로당에 가입한다고 해도 남로당이 뭔지 이름을 알아야 듣지. 남로당이 뭐인데 얼얼하든 디.. 이놈이 바른말 안 하냐고 하디만 고만 엎드려 뼏쳐 놓고 공산당 되믄(되면) 콩쪼가리도 농가(나누어) 묵는데 오늘 몽디도 함 묵어보라 하잖나.. 뭐 괭이자루 괭이 달린 채로 한참이 꼬꾸라졌어. 그래고(그리고) 난 뒤에 그 뭐 바른 소리 하라는데 바른말 할끼(할 것이) 뭐 있어야지. 여 시범을 보여줘야 안다 카믄서(그러면서) 그래여, 박금출이라 카는(라는) 사람 하나 딜다가(되리고 와) 도로 여 동네 입구여 바로 뭐 고개에서 그만 총 쏴 직이부되(죽이다).... 뭐 버둥버둥 하다가 죽어부데(죽었다)”라고 증언했었다

갈평 양민학살 사건의 규명 과제는 희생자의 수와 신원 등 정확한 책임소재도 규명되지 않은 채 멀리멀리 잊혀 가고 있는 안타깝기 한량없는 사건이 아닐 수 없으며 호국보훈의 달이 원망스럽기도 하다

마을 입구에는 지금도 양민학살희생자 위령비만이 그날을 잊지 않으려고 마을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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